시청 앞 트리에 불을 켜지면, 공식적으로 연말이 시작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니, 나의 연말이 시작된다. 종교적인 이유를 떠나, 크리스마스 트리를 점등하는 일은 내게 꼬마 시절부터 연말을 상징하는 하나의 의식이었기 때문이다.
멀티플렉스 영화관이나 쇼핑몰 등이 뭔지도 몰랐던 이삼십 년 전까지, 어린 나의 눈에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서울의 시내 풍경이었다.
특히 백화점 조명이 바뀌고, 사람이 여느 때보다 많이 다니고, 구세군 종소리가 들리고, 군밤 굽는 연기가 정다워지는 연말의 명동은 어른이 된 지금도 여전히 내 가슴을 뛰게 만든다.
■ 명동 막국수전라도가 고향이신 사장님이 말아 주신다. 30년이 넘은 맛으로, 명동 뒷골목에 얌전히 자리잡고 있는 아담한 국수집이다. 제주, 담양, 안동처럼 국수만 하는 집들이 서울에는 많지 않아서 나는 늘 불만인데, 그래도 '명동 막국수'가 있어서 시내 나들이가 즐겁다. 식사 때 가면, 조리대와 벽을 보고 앉게 배치된 열 개 좀 넘는 좌석들이 꽉꽉 들어 차 있어서 기다림은 필수다.
상호로도 알 수 있듯이 메뉴 가운데 막국수의 인기가 높다. 담담한 국물에 입에 착 붙는 고추장을 한 큰 술 얹어 나오는데, 나는 일단 고추장 풀기 전 국물을 사발채 마시고, 다시 고추장을 잘 풀어서 국수를 먹는다. 고추장이 들큰하지 않아서 입에 붙는 감칠맛을 더하고 맛의 강약을 줄 뿐, 절대 국물이 탁해지거나 하지 않는다.
시중에서 파는 소면보다 두께감이 있어서 씹는 맛과 포만감이 보장된다. 곁들여 나오는 깍두기를 아작아작 씹으면서 후루룩 넘기게 되는 국수. 고추장으로 살짝 칼칼해진 국물은 해장용으로도 좋다.
도톰한 유부를 썩둑썩둑 썰어 넣은 유부국수도 깔끔하다. 국수 먹고 남은 국물은 김밥 하나 시켜서 같이 먹어도 좋다. 3000원의 행복, 명동 막국수!
■ 소고기 국밥국밥만 40여년, 달인의 맛이다. 콧등 시린 날, 술국 하나를 가운데 시켜 두면 콩나물이며 선지를 건져 먹는 맛에 둘이서 소주 한 병은 그냥 넘어간다. 국밥도 그렇지만 이 집의 또 하나 별미는 모듬전. 고추, 호박, 생선, 부추, 완자 전을 두어 조각씩 담은 따끈한 접시가 상에 오르면, 섣달 그믐날 외갓집 놀러 온 기분이 든다.
그런 기분에 들뜨는 것은 비단 나 혼자만이 아닌지, 국밥집에 끼어 앉은 식객들이 저마다 행복한 얼굴을 한다. 퇴근길에 명동 입구에서 벗을 만나 두런두런 얘기 나누며 국밥집으로 향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즐거울 수 없는 일. 그렇게 친구끼리 문을 들어선 아저씨 손님들이 대부분이다.
개인적으로 아저씨 손님들이 몰리는 맛집은 공신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아버지나 작은 아버지, 남편만 봐도 그렇다. 아저씨 손님들은 유행이나 인테리어 등에 현혹되지 않고, 순전히 '맛'과 '내공'으로 식단을 선택하는 실속파들인 것 같다.
둘씩 셋씩 무리 지어 테이블에 앉아 열이면 아홉, 일단 술국과 모듬전을 하나씩 주문한다. 입구에서 잔칫집처럼 지져 내는 전을 접시마다 그득 담고 나르는 이모들은 시동생이나 아주버님들 맞듯이 활기차게 움직이신다. 나처럼 내공 부족한 뜨내기 손님도 찬밥 취급받지 않는다. 바쁜 가운데 서비스도 빠른 편이다.
막국수랑 김밥으로 5,000원의 만찬을 했든, 모듬전에 소주 한 잔 곁들여 지인과 회포를 풀었든 간에 뜨뜻한 속으로 길에 나오면 덜 춥다. 좀 걸어도 좋을 만큼 힘이 난다. 배가 부르면 충무로역까지 걷기도 한다.
불황 속 명동은 예전만큼 붐비지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정답다. 명동 돈까스, 오리 구이와 곱창전골이 맛있는 '신정', 오래된 설렁탕집 '풍년옥', 오리지널 중국 스타일의 만두를 먹을 수 있는 '취천루', 매콤달콤 비빔냉면과 겨울 별미 온면이 있는 '명동 함흥 면옥', 깔끔한 오징어 튀김의 '군산 오징어' 등 어떤 입맛도 맞춰줄 수 있는 식사 거리로 가득하다.
내가 태어났을 적부터 있던 '한일관'이 여태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지만. 한일관과 유네스코 회관과 코리아 극장이 있던 명동 길을 나는 대여섯 살 시절부터 엄마 손 잡고 많이 걸었다.
지난 세월의 영화(榮華)와 21세기에도 여전한 맛집들이 가득한 명동을 지나, 데이트족들은 눈 내리는 시청 앞으로 걸음을 옮겨 도심 스케이트장과 새하얀 트리를 구경한다. 팔짱을 낀 어린 연인들이 언 손을 감추고 걷는 한겨울 밤의 서울 시내는 영하의 기온에도 뜨겁다.
그대로 서울역까지 터벅터벅 걸어가 밤기차라도 타고 싶은 마음들. 아, 나에게는 추억 넘치는 길이어서 시내 나들이를 쓸 때면, '맛 칼럼' 중 이렇게 감상에 빠져버리기 십상이다.
시청을 돌아 세종문화회관 뒤 빈대떡집은 또 어떻고, 한성대 역에 내려 먹으러 가는 사골 수제비집 '다미'는 또 어떤가. 서울은 물가도 비싸고, 기실 맛있는 것도 먹기 힘들다고 투덜대지만 따져 보면 이렇게 나를 행복하게 하는 맛집들이 골목마다 버티고 있다. 이번 주말, 아님 연말 어느 휴일에라도 교통카드 챙겨 들고 시내로 나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