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채소 등 식물은 왜 고유의 색을 지닐까? 색깔(색소)은 식물이 자외선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세균·바이러스·곰팡이 등과 싸우는 무기다. 식물의 색소는 햇볕을 쬔 날이 많을수록 더 짙어진다. 일교차가 클수록 더 선명해진다. 주변의 자연조건이 가혹할 때 더 많은 화학물질을 만들어 낸다. 이 화학물질이 바로 파이토케미컬(phytochemicals. 식물성 생리활성물질)이다. 파이토케미컬은 지방·단백질·비타민 같은 필수 영양소는 아니다. 식물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 낸 물질이나 인간의 건강에도 유익하다. 지난달 28일 대전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한국식품과학회(회장 세종대 경규항 교수) 76차 학술발표회에선 ‘파이토케미컬 국제심포지엄’이 개최됐다.
2만5000가지 발견 … 세포 건강하게 유지
식물을 뜻하는 파이토(phyto), 화학물질을 의미하는 케미컬(chemical)의 합성어다. 식물 속에 포함된 모든 종류의 화학물질을 아우르는 용어다. 지금까지 약 2만5000가지나 발견됐다.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몇 안 된다. 아이소플라본·라이코펜·카테킨·캡사이신·진저롤·쿼세틴·파이토스테롤·알리신 정도다.
한국식품연구소 전향숙 박사는 “카페인(커피·차 등)·테오브로민(카카오씨·코코아에 함유, 이뇨제로 사용)·테오필린(차잎에 함유, 기관지 확장·천식 치료제로 사용) 등 알칼로이드도 파이토케미컬로 분류된다“고 소개했다.
심포지엄에서 미국 암웨이사 케이스 랜돌프 박사는 “파이토케미컬은 세포를 녹슬게 하는 유해(활성)산소를 없애는 항산화 성분으로 최적의 건강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물질”이라고 강조했다.
혈압 낮추는 루틴, 눈에 좋은 루테인
파이토케미컬은 플라보노이드와 카로티노이드 등 양대 산맥이 있다. 플라보노이드는 5000종, 카로티노이드는 700종에 달한다. 이름이 비슷하지만 루틴(rutin)은 플라보이드, 루테인(lutein)은 카로티노이드의 일종이다.
원광대 식품영양학과 이영은 교수는 “루틴은 혈압을 낮추는 성분으로 유명하다”며 “메밀에 많이 들어 있다”고 지적했다. 양파·사과·차·적포도주·감자·아스파라거스·버찌·감귤류·팥 등에도 함유돼 있다. 고혈압 환자에게 메밀 음식을 권하는 것은 루틴이 모세혈관을 강화하고 혈압을 낮춰줘서다. 루틴은 수용성이어서 물에 녹는다. 여름에 시원하게 메밀국수를 먹을 때 국물까지 마시라고 권하는 이유다.
반면 루테인은 눈 건강에 이로운 항산화 성분이다. 자외선에 의해 눈 안에 생기는 유해산소를 제거한다. 실명의 주된 원인인 황반변성과 수정체가 혼탁해지는 백내장을 예방하고 시력도 개선한다. 시금치·순무잎·브로콜리·상추 등 녹황색 채소와 망고·파파야·오렌지·키위·복숭아·늙은호박·콩·고추 등에 풍부하다.
플라보노이드, 전염병 예방에 좋아
심포지엄에선 레스베라트롤(포도 껍질과 씨·레드와인에 풍부)과 커큐민(카레의 주성분인 강황에 풍부)의 웰빙 효과가 집중 조명됐다. 서울대 약대 서영준 교수는 “칼로리를 제한하는 절식이 장수의 비결이란 것은 이제 상식”이나 “실험동물(쥐)에게 고열량 식품과 레스베라트롤을 함께 제공했더니 절식한 쥐와 수명 차이가 거의 없어졌다는 미국 하버드대 데이비드 싱클레어 교수팀의 연구 결과가 있다”고 소개했다.
커큐민은 서양에서 ‘큐어쿠민(curecumin, cure는 치료라는 뜻)이란 별명이 붙을 만큼 기대를 모은다. 항암치료에 적극 활용 중이다. 플라보노이드는 비타민P라고 불린다. P는 Permeability(투과성)를 뜻한다. 플라보노이드 섭취가 부족하면 모세혈관의 투과성이 높아진다. 그러면 출혈이 일어나기 쉽고, 세균·바이러스 침입이 쉬워진다. 신종 플루·A형 간염·수족구병 등 바이러스에 의한 전염병이 유행할 때 플라보노이드를 충분히 섭취하는 것이 좋다.
플라보노이드의 또 다른 주요 기능은 비타민C의 체내 흡수를 돕는다는 것이다. 비타민C 500㎎을 섭취한다고 가정하면 플라보노이드를 20%(100㎎)는 먹어야 비타민C의 흡수율이 극대화된다. 과일·채소 등 천연식품엔 비타민C와 플라보노이드가 함께 존재한다.
여러 가지 과일 섞어 먹는 게 효과적
전북대 기능성식품임상지원센터 채수완 교수는 “채소·과일을 즐겨 먹는 것이 파이토케미컬을 가장 유용하게 섭취하는 방법”이라고 지적했다.
즐겨 먹는 채소·과일의 가짓수를 늘리면 각 식품에 함유된 여러 파이토케미컬들이 시너지 효과를 나타낸다. 미국에서 ‘eat 5 a day’(하루 5접시의 채소·과일 섭취) 캠페인을 벌이고, ‘레인보 다이어트’(무지개처럼 여러 색깔의 식품 섭취)를 강조하는 것은 이래서다.
어떤 채소·과일을 골라야 할지 고민이라면 ‘여럿을 섞는 것이 최선’이다.
가능한 한 신선한 채소·과일을 생으로 먹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파이토케미컬 섭취법이다. 라이코펜(전립선암 예방에 유효)이 든 토마토는 예외다. 라이코펜은 열을 가하면 식물의 세포벽에서 더 쉽게 빠져나오므로 조리한 토마토에서 더 많이 섭취할 수 있다.
걷기·자전거타기·수영 등 무리하지 않는 유산소 운동은 파이토케미컬의 항산화 효과를 높여준다. 저강도의 운동을 하면 체내에서 SOD 등 항산화 효소가 더 많이 생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