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엔 먹을 게 없다'고 누가 모함했던가? 물론 경상도는 전라도처럼 모든 음식이 풍성하거나 먹음직스럽지는 않다. 지역 출신이 아니면 이해하기 어려운 독특한 음식 정서가 있다. 하지만 경상도 구석구석에는 전 국민이 인정할 만한 별미들이 숨어 있다. 경상 남·북도 5개 시·군을 돌면서 찾아낸 별미를 D1면 의령소바에 이어 소개한다.
경북 영주 '태평초'
메밀묵과 김치를 펄펄 끓이면… 태평함이 뱃속 가득
경북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에 들어서자 아름드리 소나무 사이 멋들어지게 들어선 한옥 한 채가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니 연못 가운데 돌로 단을 쌓아 만든 인공 섬이 있고, 그 섬에 육각형 정자가 서 있다. 현판에 '봉도각(蓬島閣)'이라고 쓰여 있다.
문화재는 아닌 듯, 촌로(村老) 서넛이 정자 기둥에 기대고 앉아 한담을 나누고 있다. 안내판은 "봉도란 신선이 산다는 봉래(蓬萊)란 의미"로 "옛 순흥도호부 청사 뒤뜰에 영조 30(1754)년 부사 조덕상이 논을 파서 연못을 만들고 그 가운데 인공섬을 쌓고 정자를 세웠다"고 설명한다.
봉도각 옆으로 '경로소(敬老所)'라고 적힌 한옥 한 채가 있는데, 역시 촌로 다섯이 드러눕고 옆으로 눕고 벽에 기대고 앉아 더위를 피하고 있었다. 이 마을 노인정이다. 전국에서 가장 '럭셔리'한 노인정 아닌가 싶다.
봉도각과 절묘하게 어울리는 음식이 이 지역에 전해온다. '태평초'다. 이 음식을 하는 식당이 봉도각 바로 옆에 있다. '원조순흥묵집'(054-632-2028) 주인 민봉순 할머니는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음식인데, 화로에 바글바글 끓여가며 태평하게 먹는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했다.
납작한 냄비에 잘게 썬 김치를 잔뜩 담는다. 여기에 길게 썬 메밀묵과 잘게 썬 돼지고기, 깻잎, 들깻가루, 김가루, 팽이버섯 따위를 듬뿍 얹고 들기름을 뿌려 불에 얹고 약한 불에 익혀가며 먹는다. 구수한 메밀묵과 시큼한 김치, 기름진 돼지고기가 절묘하게 어울린다. 들깻가루와 들기름이 고소함을 더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묵이 뭉그러지고 김치와 어울리며 혼연일체의 경지에 오르는데, 여기에 조밥을 비벼 먹으면 뱃속이 진정으로 태평하고 행복해진다.
원래 메밀묵으로 이름난 식당이다. 메밀묵의 진수를 맛보려면 '묵조밥'을 시킨다. 길게 썬 메밀묵을 멸치 국물에 말고 참깨, 김, 잘게 썬 청양초, 김치, 참기름을 뿌려 사발에 낸다. 조밥이 곁들여 나온다. 메밀묵이 입술에서 미끄러질 듯 매끄럽다. 씹을 틈도 없이 부드러운데, 구수한 메밀향이 코로 올라온다. 참기름 냄새와 잘 어울린다. 멸치 국물이 심심한 듯하지만 끝까지 존재감을 잃지 않는다.
태평초 1만5000·2만원, 묵조밥 5000원, 공기밥 1000원. 메밀파전(5000원), 칼국수(5000원), 조를 넣어 샛노란 동동주(5000원)도 투박하면서도 깊이가 있다.
경북 청송 '닭불고기'
퍽퍽한 닭 가슴살의 촉촉한 변신
경북 청송군 진보면 신촌리에서 '닭불고기'가 탄생한 건 약수로 끓인 닭백숙 덕분이다. 청송과 영변을 잇는 34번 국도변에 있는 신촌리에선 칼슘, 철, 마그네슘이 녹아있는 물이 쏟아진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찾고, 동네 사람들은 약수에 닭과 쌀을 넣고 끓인 '닭백숙'을 팔았다. 손님들은 닭 다리와 날개는 맛있게 먹었지만 퍽퍽한 가슴살을 남겼다. "터벅터벅하잖아요. 서로 닭다리만 먹고 몸통은 남겼거든요."
'신촌식당' 주인 권열오(74)씨가 '어떻게 하면 닭 가슴살을 맛있게 먹을 수 있을까'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닭불고기를 만들었다. 생닭 가슴살을 곱게 갈아 고추장, 간장 등 양념에 버무린다. 냉장고에 40시간 숙성시킨다.
석쇠에 이 닭가슴살 반죽을 얹어 가스불에 직화로 굽는다. 가장자리가 여기저기 먹음직스럽게 거뭇거뭇하다. 퍽퍽하지 않고 촉촉하다. 매운맛이 아주 살짝, 전체적으로 달콤찝찔한 간장 양념이다.
자리 잡고 거의 앉자마자 닭불고기가 나왔다. 미리 구워놓은 건 아닐까 의심됐다. "주문 들어오면 바로 구워요. 1~2분이면 다 굽는데 뭘. 미리 구워놓으면 쪼그라들어서 안 돼요."
채 썬 양배추에 케첩과 마요네즈를 뿌려 그대로 낸 '사라다' 등 소박한 반찬이 딸려 나온다. 사이다가 '서비스'로 나오는 게 특이하다. '닭불백숙'(1인분 1만원)을 주문하면 닭불고기와 닭백숙 둘 다 나온다. 닭불고기만 주문하면 8000원, 닭백숙 9000원이다.
닭백숙은 스테인리스 사발에 죽이 가득 담겨 있고, 그 안에 큼직한 닭다리 하나가 솟구치듯 담겨 있다. 죽이 너무 걸쭉한데다 푸르스름해서 첫술을 뜨기가 좀 버겁다. 그러나 한 숟갈 넣고 나면 얘기가 달라진다. 멥쌀에 찹쌀을 아주 약간 섞어 끓인다는 죽은 쌀알이 퍼지지 않고 탱글탱글하다. 식당 책임자 이인자씨는 "약수에 끓여서 푸르스름하고 쌀도 잘 퍼지지 않는다"고 했다. 'ㄱ'자 한옥이 정갈하다. 신촌식당(054-872-2050) 포함 네댓 집이 닭불고기와 닭백숙을 한다.
경북 김천 '오뎅탕'
초밥집 가서 이렇게 주문하세요 '여기 오뎅이오'
초밥을 먹으러 부산도 아니고 통영도 아니고 영덕도 아닌, 경북 내륙에 있는 김천으로 간다? 사실이다. 김천역 앞 골목에 있는 '초밥집' 때문이다. 1942년 문 연 노포(老圃)다.
상호는 '초밥집 대성암 본가점'이지만 우동과 오뎅탕(어묵탕)이 훨씬 훌륭하다.
우동은 도톰한 면발이 매끄러우면서 말랑말랑, 그러면서도 껌처럼 쫄깃한 탄력을 잃지 않는다. 한국에서 이만큼 우동 국수를 잘 삶아내는 집은 드물다. 찝찔하면서 깊이가 있는 국물은 일본 도쿄에서 맛본 것과 비슷하다. 놀라운 맛이 단돈 3000원.
오뎅탕은 여러 종류의 어묵과 새우, 작게 자른 문어, 새우, 무, 얼린 두부 따위가 푸짐하게 들어간다. 국물이 우동과 비슷하지만 더 가볍고 달착지근한 맛이 첨가됐다. 두부를 얼렸다 해동하면 수분이 빠지면서 구멍이 숭숭 나는데, 씹으면 이 구멍에 흡수돼 있던 국물이 배어 나오며 입안을 흠뻑 적신다. 오래 끓이면서 짙은 갈색이 된 무는 젓가락만 대면 삭 갈라질 정도로 부드럽고 달다.
광어 따위 흰살생선을 사용하는 생선초밥과 새우초밥은 초밥집이란 이름이 무색하다. 그만하면 괜찮은 편이기는 하나, 밥알이 너무 단단하게 서로 뭉쳐 있어서 입에 넣었을 때 초밥이 사르르 풀어지며 생선살과 섞이지 않고 따로 노는 느낌이다. 초밥도 단맛이 강해서 생선을 억누르는 듯하다. 김초밥이 더 낫다. 부드럽고 폭신한 일본식 달걀말이와 생오이, 단무지, 초밥이 잘 어울린다.
특초밥 1만원, 새우초밥 8000원, 새우생선초밥 7000원, 생선초밥 6000원, 김초밥 5000원, 유부초밥 6000원, 모둠초밥 5000원, 오뎅탕 8000·1만3000원. 대성암본가 (054)434-7257
경남 진주 ' 진주냉면'
한량이 기생과 어울려 입가심으로 먹던 그 냉면
진주는 음식이 발달할 수밖에 없는 도시였다. 산과 들과 바다가 지척이라 물자가 풍부한 데다, 조선시대 평양 버금가는 교방문화의 중심이었다. '진주냉면'은 한량들이 기생과 어울려 입가심으로 먹었다고 한다. 진주냉면은 해물육수가 특징이다. 멸치에 대합과 홍합 따위 해산물을 달인 국물에 조선간장으로 간을 맞춘다. 뜨겁게 달군 무쇠를 국물에 담가 온도를 갑자기 올려 비린내를 제거하기도 한다. 메밀가루에 전분을 섞은 국수를 이 국물에 말고 전복, 문어, 석이버섯, 쇠고기 육전처럼 값비싼 음식을 꾸미로 얹었다. 구한말 관아에서 일하던 숙수들이 지금의 중앙시장에 가게를 내면서 대중화됐다고 한다. 6~7곳이나 되던 진주냉면집은 1960년대 중앙시장 화재 이후 서부시장 등으로 흩어졌다가 차츰 잊혀졌다. 지금까지 대를 이어오는 곳으로는 '진주냉면'(055-756-2525)이 꼽힌다.
물냉면을 주문하자 채 썬 쇠고기 육전과 노란 달걀 지단, 오이, 배, 편육, 물김치, 파채, 참깨를 얹어 내왔다. 삶은 달걀 반 개가 아니라 얇게 썬 한쪽이 나오는 게 특이하다. 국물이 시원하고 개운하면서 해산물 비린내가 없다. 바삭할 정도로 구운 육전에 국물이 배어들어 맛나다. 국수는 전분이 많이 들어갔는지 다소 질기고 미끄러운데다 메밀향이 적어 아쉽다. 물냉면 6000·7000원, 비빔냉면 6500·7500원, 육전·육회 2만·3만원 |